• 최종편집 2024-04-27(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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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전광섭

 

 

철창신세가 며칠 동안이나 지났는지.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까 갑갑한 마음을 털어놓을 데가 없다. 제일 궁금했던 게 내가 왜 여기를 왔는가 하는 의구심이다.

 

설마 전투 중에 도망가던 포로를 죽인, 그것도 고함치며 작전을 노출시키던 놈을 하나 죽인 것. 이게 사건이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처사다. 나는 반성은커녕 날마다 불만만 쌓여가고 있다. 40명의 목숨을 관리하는 소대장 한명을 이처럼 헌 신짝처럼 처박아 놓는다면 이게 얼마나 큰 비전투 손실인가! 참으로 군대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이율배반의 집단이란 말인가?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그리고 사단장까지도 악수하며 아껴주던 나였는데 이토록 감감무소식 철창신세라. 울분을 삼키지 않을 수없는 나날들이 계속 흐르고 있다.

 

너무 긴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내가 이러고 있는 시기에 나의 훈련시절 단짝이었던 A중위가 야간 매복근무 중에 적으로부터 역매복을 당하여 수류탄 공세를 받고 산화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50년 후에 알게 되었다.

 

내가 3소대장이었고 그가 2소대장으로 같은 중대내의 단짝인 동료였었고, 특히 갑종장교의 육군보병학교 191기 4구대(4반) 바로 옆자리 클라스메이트였었던 친구다.

 

“아~나를 이곳 영창으로 잠깐 피신시켜 주신 그분...”

계속 불만투성이로 지내오던 긴 날들을 일순간 감사와 뉘우침의 순간으로 깨닫는 것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홈바산의 그토록 길던 야간매복, 첫 기습을 받을 때 바로 옆에 피할 바위를 있게 하신 일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전장에서 5천명의 전사자대열에 단 한명의 소대원도 포함되지 않은 점.

 

비단 이러한 행운(?)이 나뿐이랴 마는 얼마나 영광스런 자랑인가, 길 가다가도 그때의 일이 떠오르기만 하면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곤 한다.

 

오늘은 찦차를 타고 헌병 중대장의 인솔로 또 어디를 간다.

어디를 간다는 얘기도 없이 나를 데려 간다. 갑갑하다. 뽀얀 길바닥의 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한 곳은 주월한국군사령부의 ‘보통군법회의’장이다. 좌우를 보니까 몇몇 병사들이 손이 묶인 채로 자리를 잡고 있다. 중대장의 안내로 나도 그 중에 자리를 잡는다.

 

잠시 후 재판관들이 배석하더니 곧바로 재판을 진행한다.

내 차례가 되었다.

 

“..... 전소위 그날 ‘파홈타이’영감을 누가 죽였는가?”

“예, 제가 죽였습니다.”

 

내 부하가 죽였으니까 당연히 내가 죽인 거라 생각했다.

실내가 다소 웅성거리는 분위기다.

 

“전소위, 어떻게 죽였는가?”

......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경황이 없었던 차에 워카 발로 한 두대 찼던 거 같습니다.”

 

재판장 B대령은 좌우에 배석한 참모들을 번갈아 보며 또 말한다.

 

“의무 참모, 워카발로 한·두 대 차서 사람이 죽을 확률이 있는가?”

...... 의무참모가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아!~파월직전 12사단 시절 3군단 내에서 장교들 야구시합 때 같은 팀에서 내가 서드베이서였고 내 뒤에 외야 수비를 받쳐 주었던 레프드필더였던 경기고출신 전병호 의무장교 소령(시합 때는 대위)이었다.

 

반가움 반, 창피함 반의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잠시 후 그는 약간의 고개를 숙인 듯 하는 모습으로 대답한다.

 

“워카발로 백대를 차도 안 죽을 수가 있고 단 한대를 차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재판장은 또 한 번 묻는다.

“전소위, 전소위가 정말 찼는가?”

 

왜 같은 말을 되풀이 시키는가?

남자 일구이언은 싫다. 그때만 해도 남다른 부하사랑의 의협심으로 지내 온 나다.

 

“예, 제가 찼습니다.”

......

재판관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고를 하더니 구형을 내린다.

“피고, 전광섭소위. 특수폭행치사 징역 1년6개월”

 

재판이 끝나고 바깥을 나와서 곧장 한줄기 쏟아 부을 듯한 먹구름을 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인솔 헌병중대장과 찦차로 가면서 핀잔을 받는다.

 

“전소위 참 답답하오. 내가 안 죽였다하면 끝나고 사병 한 두 명을 귀국시키면 되는 것을...”

자기는 나를 아끼며 하는 말이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다.

 

또다시 헌병대 가설 유치장의 양철지붕에서 기관총 소리를 퍼 붓는다. 열 식히라고 스콜이 굵은 빗방울을 퍼 붓는다.

‘우르르 쾅’ 제법 긴 시간 쏟아진다.

 

아~정신이 혼미해 진다. 소대원들의 얼굴 몇이 떠오른다.

이상병· 박일병의 군화발. ‘파홈타이’의 신음.

이 모두가 긴 세월 후에는 값진 진주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또 든다.

 

비록 적이긴 하지만 '파홈타이' 늙은이는 목숨을 걸고 살기를 체념한 채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 동료들을 피난케 한 귀한 희생을 감내했었고 그를 사망케 한 두 병사는 우리가 당할 수도 있는 역습을 잠재운 용감한 살인이었던 점을 져버릴 수 없다.

 

바로 직전까지 그들은 불빛신호를 주고받던 베트콩들이 아니었나. 이런 상황도 모른 채 하나의 사체를 두고 살인이라는 죄명으로 결론을 내버리는 군사재판의 편의성.

 

5.16 박정희 시절 그의 동기(만주 군관학교)였었다는 이소동 사단장은 맹호사단 보다 한해 늦게 파월 되었던 백마사단인데 왜 그렇게도 안전사고 등등의 비전투 손실이 많느냐고 상부로 부터 질책을 받던 터라 그는 신상필벌주의로 전투병력을 다스림이 과연 군의 사기를 얼마나 떨어뜨렸는가를 곰곰히 곱씹어 봄직하다.

 

그날 군법무관 ‘조××’중위는 철저하게 사단장의 방침에 따르는 사람 같았다.

전투병의 ABC를 전연 무시한-각박한 상황에 대한 정상참작을 져버린-밥맛없는 법무관이라고 두고두고 원망스러운 젊은이라고 낙인찍어 버린 적이 있었다.

 

나는 이제 땀의 결정체로 반짝이는 소위계급장을 떼버려야 하는지.

다음에 맞이할 시간들을 맥 빠진 채로 기다릴 뿐이다.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전장에 뛰어든 마당에 이까짓 한 목숨이 뭐 그렇게 귀중하냐! 인간의 생사화복은 그 분의 권한이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난 이 길로 어떻게 되나, 두·세평 남짓한 철장 속에서 군생활의 미래는 도무지 보이지 않고 살아서 돌아간들 그 많은 지인들을 뭔 낯으로 뵙나? 청춘은 한 많은 인생으로 종을 치는구나.

 

무엇보다 유소년시절부터 가난을 딛고 땀 흘리며 여기까지 온 데 대한 인생 1막의 종착역이 비참한 영창살이로 끝맺음 한다는 것은 너무 어처구니없는 내 자신이 아닌가.

 

그때는 하나님을 전연 알지 못했던 유교풍 집안의 자식이기에 그저 불평·불만만을 일삼아 오던 자신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했었다. 나를 만나던 친구 중에는 반가운 기색이 전연 없는 나에게 “너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인상 좀 펴고 다녀라.” 라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곤 했다.

그때부터 한 동안 미소를 잃어버리고 살아 온 것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 친구가 와도 만나기 싫고, 바닷바람도 늘 혼자서 쐬고.

 

주변에는 나의 기둥이 될 만한 사람이 없다. 아니 찾아보려는 의욕을 몽땅 상실한 채, 살아 갈 고민을 하질 않고 방황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지나고 보니까 굉장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게 아닌가싶다. 1970년대만 해도 우울증이란 병명은 생소한 단어였다. 전쟁을 치르고 난 병사들은 그때의 공포 후유증을 완전히 벗어나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겠나 싶다.(다음에 이어집니다)

[국가유공자·베트남참전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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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전광섭의 ‘진주알들의 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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